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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신승호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 마가복음 3:1-6
2017년 6월 18일 신승호 선으로 악을 이기라 창세기 3:22-24
2017년 6월 11일 신승호 성령님 오심으로 내가 누릴 수 있게 된 것 요한복음 14:16-21
2017년 6월 4일 신승호 가서 복음을 전하라 로마서 10:13-15
2017년 5월 28일 신승호 우물 안에서 뛰쳐 나오라 데살로니가전서 4:1
2017년 5월 21일 신승호 하나님의 선물 에베소서 2:1-10
2017년 5월 14일 신승호 마음을 넓게 열라 로마서 15:1-7
2017년 5월 7일 신승호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1-11
2017년 4월 30일 신승호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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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9일 신승호 이상의 나, 현실의 나 23
우리 안에는 두 가지의 '나'가 있다. 양심을 따라 선하고 올바르게 살기 원하는 '이상의 나'와 몸과 맘이 원하는 대로 따르기 원하는 '현실의 나'다. 그 둘이 맞서 씨름할 때 과연 어느 쪽이 이길까. '이상의 나'라는 것에 대해 아예 무관심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 쓴다 하더라도 '현실의 나'가 이기는 건 거의 보장된 일이다. 실제 삶에선 이상보다 현실이 단연 앞서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말해 '현실의 나'란 정욕에 매인 모습이다. 정욕은 달콤하지만 채우고 채워도 만족함이 없다. 즉 '현실의 나'를 따르는 것은 스스로 노예가 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자유와 평안은 '이상의 나' 안에 있다. 그 안에서야 진정한 만족을 누린다.

믿음이 아니고는 '이상의 나'를 올바로 정의하지 못한다. 이상 자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하는 것이고 그 창조주의 뜻은 양심보다 더 높은 차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상'에 대해 맘 쓰게 되는 근원이 뭘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이상을 사모하는 기본 바탕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무시해도 될 일이 아니다. 무관심하다면 스스로를 동물 취급하는 격이다.

'이상의 나'에 대한 의식이 희박할수록 믿음의 삶은 이중적이 되기 쉽다.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삶과 모습은 세속적, 정욕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잘 돌아보면 너무도 쉽게 정욕으로 하여금 삶의 많은 일에서 판정승을 거두게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절제하기보다는 육신의 쾌락과 죄의 유혹에 별 거리낌 없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거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의 자녀라면서도 우린 얼마든지 어둠의 세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구원 받은 사실을 천국 시민권 취득처럼 여길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늘 되새겨야 한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이상의 나'를 향해 이끄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현실의 나'에 집착하고 있을 순 없다.

결국 '이상의 나'의 표본은 사람 몸을 입으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가라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가라고 말씀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자신을 다스리고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의 힘이면 극복할 수 있다. 주님을 바라보며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믿음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포기할 일이 아니다. 현실 삶과 무관하다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나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며 힘을 불어넣어 주시려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상의 나'를 더욱 강건케 하셔서 육신의 나, 현실의 나를 밟고 일어서게 하신다. 믿음을 가진다면 그 승리를 이뤄내야 한다.
2016년 9월 10일 신승호 우린 왜 존재하는가 18
우주 공간에 끝이란 게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알 길이 없다. 끝이 있다면 그 다음은 뭘까. 상상이 안된다. 추정하자면 우주는 무한의 공간일 것이다. 또 하나,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는 뭘까. 물리학자들이 찾고 찾지만 찾을수록 더 작은 입자들이 계속 나온다. 역시 추정하자면 물질의 기본 단위도 무한소일 것이다.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 못할 일이다. 시간적인 무한, 즉 영원이란 것도 사람 논리로 설명해볼 길은 없다.

공간 안에 갇혀 있으니 공간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지 않고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감각으로 느껴지고 머리로 이해되는 정도 안에서 뱅뱅 돌 수밖에 없다. 끝이 있어야하는 시공 안에서는 끝이 없다는 게 뭔지 그려볼 길이 없다. 그건 하나님의 영역이다. 결국 존재에 대한 해답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의 존재 원리인 ‘자연과학’도 창조하셨다. 즉 하나님의 차원은 자연과학 너머의 ‘신비’다. 왜 신비이어야 할까. 우주만물 속에서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으로 하여금 그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안에서 찾게 하시려는 뜻이다.

창조의 신비를 믿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사람의 차원과 이성 안에 가둬 두기 때문이다. 우리 머리의 한계는 ‘끝’이란 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3차원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란 인간 차원을 뛰어넘어 계신다는 뜻이다. 차원마저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다.

100년도 못되는 인생살이…, 끝이 빤한 시간 안에서 행복하고 만족해보려 애쓰는 게 우리 모습이다. 그 노력의 결과가 기대에 어긋날 때 실망과 불만으로 마음 상하고 좌절한다. 사람의 차원, 자신의 한계에 걸려 끊임없이 넘어지면서도 그 해결책을 사람과 물질, 세상 속에서 찾으려는 것이 인생이다. 만물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께 마음 향하기가 그리도 어렵다.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다윈의 진화론을 믿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있다. 스스로 독립된 존재이길 원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선, 아무런 계획과 목적이 없이 아메바처럼 어쩌다 그냥 생긴 존재라고 믿기 원하는 것 아닌가. 그냥 생겼다면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가. 그에 비해 하나님의 섬세하신 디자인과 계획을 따라 창조되어 삶속에서 구체적인 존재 목적을 가지고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은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가. 소망이 넘치고 힘이 솟는 삶,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것처럼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은 없다.

자신의 가치를 하나님 안에서 찾고 있는가. 사람들 속에서 사람의 기준 따라 사람 차원의 극히 제한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진 않나. 진정한 나의 가치를 확인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초월하심과 주인 되심을 깨달아야 한다. 이해가 아닌 믿음으로 말이다.
2016년 8월 18일 신승호 서로 돕게 만들어진 인간 11
"미안합니다" 라든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 하기는 꽤 어렵다. 자존심 때문이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시인하기 싫기 때문이다. 흠 없고 온전하기 원하는 것은 사람 본성이다. 그래서 실제 잘못을 했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도움 요청 자체를 자신의 부족함 내보이는 것으로 여겨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도 청하기를 꺼리거나 안하고 만다. 도움 받는 일을 수치로 여기기까지도 한다. 도움 없이 해내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도움이 없어서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사람은 불완전하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지으셨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완전함 향해 자라가게 하시려는 뜻이지만 '서로 돕는 삶' 살게 하시려는 뜻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나님 사랑을 이 땅에서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마음가짐이 먼저다. 그와 더불어 이웃의 도움을 꺼림 없이 진정한 감사의 마음으로 받는 자세도 필요하다.

도움 받기를 싫어한다고 남을 돕지 않는 건 아니다. 남을 돕는다는 게 뒤집어 생각하면 자신의 상대적인 강함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도움 받기는 거부하면서도 남 돕는 일엔 적극적인 사람들 의외로 많다. 일종의 '자기 의'다. 반대로 남에게 도움 받기는 잘 하면서도 남 돕는 일엔 인색한 사람들도 있다. 사람을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동기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 볼 수 있다.

"내 모습 이대로" 라는 말에서 위로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마음속으로 연약함을 의식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속에서 약하지 않게 보이려 애쓰기 때문이다. 약한데도 강한 듯 치장하는 건 이미 공인된 일이 돼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치장을 잘 해도 부족과 연약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신앙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모습이다. 뭐가 달라야 하는 건가. 강한 모습이 아닌 진실한 모습이다.

도움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도울 줄도 안다. 자기 연약을 감추지 않는 마음으로는 남의 연약이 흉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와야 하는 사명으로 보게 된다. 자기 만족을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연약함을 돕기 원하는 마음으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실…, 편하게(?) 얻은 구원이라서 별 감동도 감사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고도 세상 자녀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게 혹 현대 크리스천의 모습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크나큰 도우심이다. 그 은혜의 자리에 가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우린 서로 돕도록 지어졌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도 결국은 서로를 돕는 일이다. 풀포기에 불과한 존재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 도우심을 마음 다해 전하는 자가 진정한 신앙인이다.
2016년 7월 26일 신승호 나는 제대로 믿고 있는가 15
왜 믿는가. 유익이 있으니 믿는다. 그 유익이 뭔가. 영생이라는 장래의 일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뜻은 나만 아니라 나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게 하심이다. 남을 위하는 일까지도다. ‘자신만을 위한’ 믿음이 기독교계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현실과는 반대다.

기복신앙이 왜 안 좋은가. 자기 위한 것이라서다. 내 소원 이뤄달라고, 필요한 것 구하려, 어려울 때 도움이 필요해서, 그런 때만 필요한 하나님인가. 그게 믿음인가. ‘나’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 중심으로 나만을 위하며 내가 잘 되기를 위해 믿는 것이라면 우상 앞에서 절하는 것과 다를 게 뭔가.

교회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이 갈수록 더해가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교회다운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점차 빈번해진다. 신앙인으로서의 당당함이 잠식당하고 있는 느낌마저 있다.

머리이신 예수님이 드러나셔야 할 교회에서 사람이 드러나는 게 문제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셔야 할 결정을 하인들이 하려니 뜻이 갈린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닌 성도의 모임인데도 사람이 소유주인 이익 집단이 돼가는 느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성도들이 모인 곳인데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예배가 사람의 감각을 만족시켜줘야 하는 ‘행사’가 돼간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귀족이나 특권 계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꾼이며 섬기는 위치다. 그런데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가짐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사랑’의 의미가 조건 없는 희생적인 것임을 잘 알면서도 실제 삶에선 그 사랑을 주고받는 ‘정’처럼 여기다 보니 포근하고 위로 넘치는 공동체이기보다 한 몸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등 돌리는 일이 생겨나고 서로 마음을 찢는 일까지도 보게 된다.

‘배은망덕’이란 말은 꽤나 악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린 혹 하나님께 배은망덕하고 있진 않나. 예수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일…, 어떻게 주신 구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데 우린 그 은혜 드러내기를 자신 위함보다 더 힘쓰고 있는가.

사람은 본성이 이기적이다. 그래서 믿음마저도 이기적인 것이 되기 쉽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희생하신 그 사랑을 힘입어 우리도 그 이기성을 이길 수 있다. 사랑의 힘이다.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 원하시는 믿음은 결국 ‘남을 위하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다.

나는 제대로 믿고 있는가. 내게 있는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믿음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 따라 어둔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이웃과 세상을 돌아보고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어떻게 해야 세상에 하나님의 빛 비추는 삶이 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믿는 자라면….
2016년 7월 5일 신승호 바른 선택의 중요성 15
어린 자녀들이 부모 말을 잘 듣다가 언제부터인가 성가시게 여기기 시작한다. 자기 나름의 뜻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 더 앞서기 시작한다. 별 생각 없이 엄마 아빠를 따랐다가 점차 ‘나의 선택’에 눈이 떠가는 것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 눈뜨는 순간부터 무엇을 어떤 목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지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 일상이다. 그 선택은 권리이지만 그래서 책임이 꼭 따른다. 부모 말 따를 땐 책임이 없었는데 내 뜻대로 한 결과는 내 책임이다. 선택을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한 이유다. 선택 하나가 길게는 한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더구나 믿음에 대한 선택은 그 영향이 영원에까지 이른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어느 광고문은 제품의 신뢰도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지만 선택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짧은 문구가 인상 깊게 와 닿는 이유다. 하지만 선택의 중요성을 아무리 잘 인식하더라도 실제 삶에서 바른 선택을 하려는 노력이 없거나 선택의 일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결과는 얼마든 안 좋게 된다.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일마다 때마다 돌아보는 일은 필수다.

직업, 환경, 진로 같은 외적인 선택도 있겠지만 먼저는 자신의 내부다. 마음가짐이 바로 돼야 몸과 삶이 바로 되기 때문이다. 게으르기보다 부지런함을, 포기보다 인내를 선택하는가. 미움보다 사랑을, 정죄보다 용서를, 받기보다 주기를, 분노보다 웃음을 택하는가. 낙심보다 믿음, 염려보다 기도, 어둠보다 빛을 택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우린 흔히 ‘자유’ 에 초점을 맞추고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석하기 쉽다. 초점은 ‘의지’에 있다. 의지의 자유다.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선택이 내게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멸망이나 파괴로 향하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신앙인들이 특히 유념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둠의 길을 두셨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을 맡기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생명과 빛 택하기를 원하시며 기다리신다. 그 뒤에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비돼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가진다면 그 약속을 취해야만 한다.

생명과 빛을 택하려면 먼저 자신의 정과 욕심을 다스려야 한다. 사망과 어둠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 뜻과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고 완벽해도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견줄 수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갈 때 내 삶의 모든 순간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면서 또한 돌아봄의 연속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선택이 바른 것이었다고 흡족해 할 수 있다면 그게 삶의 보람이고 가치 아니겠는가.



2016년 6월 14일 신승호 생각을 다스려야 건강해진다 18
"자넨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이런 말 해보거나 들어본 적 있는가. 사람을 '생각하는 동물'이라며 '생각'을 동물과 구분하는 고등 능력으로 여기지만, 생각이 많은 바람에 머리가 아픈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많은 것이나 머리 속이 복잡한 것을 좋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 단순한 사람 부러워하는 것이지, 단순한 사람은 단순함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 많은 게 사람에 따른 됨됨인가. 환경의 영향은 아닌가. 바꾸거나 개선할 수는 없는 건가.

잠시 짬을 내서 먼 곳을 바라본다. 멍한 표정에 입을 벌린 채로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아무 생각 없는 상태가 돼본다. 그게 잘 될까. 얼빠진 모습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얼'이 빠질 수 있나. 생각하는 일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다면, 두뇌 회전을 맘대로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하기를 쉬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면 사람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울 거다.

생각이 많은 건 좋게 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이해하는데 깊이가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물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안 좋은 면도 있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 바람에 그릇된 판단에 이르기도 한다. 도리어 분별이 흐려지고 불필요한 오해도 생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 많은 생각들이 다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이면 좋겠는데 쓸모없고 무익한 게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정보 홍수, 미디어 다양화, 과민한 자기 관리 등으로 인해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뇌'다. 소위 '잡념'이라고 하는 것은 무익하기만 한 게 아니다. 잡념은 마음을 갉아먹는 벌레 같아서 기초를 약하게 만들고 가만 놔두면 마음병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두뇌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무익한 생각들이 두뇌의 피로를 가중시켜서 정작 심사숙고 해야 할 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과도한 두뇌 사용이 정신질환으로 발전한다. 머리를 많이 쓴 사람이 알츠하이머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모르거나 경시한다.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관건이다.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왜 하고 있는지를 늘 진지하게 모니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의지력을 동원해서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필요한 생각과 쓸데없는 생각을 가려내서 무익한 것들은 쓸어내버려야 한다. 선택 사항이 아닌 꼭 해야할 일이다.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닌 중대한 일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됨됨의 문제가 아니다. 다스리려는 의지와 결단으로 풀어가야 한다. 특히 믿음의 삶에선 복잡한 머리가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게 하는 주범이다. 단순할수록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잘 받아들이고 생각이 적을수록 믿고 따르기를 잘한다. 그래서 성경은 두뇌를 건강하게 지킬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

2016년 5월 24일 신승호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 15
'양심'의 역할은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한 후에는 선 쪽을 택하라는 것이 우리 안에 양심을 두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다. 동물에겐 없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선한 생각과 마음을 품고 선한 행위와 관계,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궁극적인 뜻이 있다.

선 아닌 악을 택하면 가책이 따른다. 가책은 잘못을 저지름에 따라 생성되는 불순물이다. 그 불순물이 쌓여가면 양심이 더러워지고 오염되어서 선악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손이 더러울수록 더러운 게 묻어도 모르는 격이다. 그래서 가책은 그때 그때 처리해야 한다. 처리법은 한 가지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갚을 수 있는 것이면 갚아야 한다. 가책을 씻어낼 유일한 길이다.

결국 가책의 근원은 잘못 자체보다 잘못 저지른 사실을 감추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근본이 악하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는 일에서 자유할 순 없다. 그렇다면 초점은 잘못보다 잘못을 드러내는 여부에 있다. 가책은 속박이고 드러냄이 해방이다. 진실과 거짓의 갈등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먹고 숨었던 일, 벌거벗은 수치를 가렸던 일로부터 이 순간까지 계속된다.

신앙인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 중의 하나가 죄의 유무에만 마음 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죄의 유무보다 죄의 시인 여부다.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지만 죄를 회개함이 없다면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게 뭔가. '정직함'이다. 정직이란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 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정직은 사람 됨됨의 바탕이고 생명력이다. 공직자들이 부도덕과 부정에 연루됐어도 스스로 시인하고 사과하면 용서받는 것이 그 증거다. 부도덕과 부정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비슷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관점에서는 선악의 정의를 정직과 부정직으로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죄인 됨, 허물과 부족을 시인하고 드러내는 일이 없으면 아무리 의롭다 해도 외식하는 바리새인에 불과하다. 사람의 의로운 정도는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어서 정직하지 못하면 그 의로움은 아무 가치도 없게 된다. 우리는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의’를 안다. 하지만 정의는 근본이 악한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정의 구현'보다 '정직함'이 먼저다. 서로가 정직하기를 힘쓰면 정의가 이루어져 간다. 정직함이 세상을 밝히는 길이다.

정직은 이웃사랑과도 직결된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남도 용서하게 되는 법이다. 용서받음의 은혜를 진정으로 체험하는 정직한 사람이 남을 품을 수 있다. 나는 정직한가. 얼마나 정직한가. 자신의 정직함을 가늠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혼자 있을 때의 나와 사람들 속에서의 나가 같은가 다른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
2016년 5월 3일 신승호 원칙과 융통성 사이 15
마음이 너그럽다거나 잘 품어준다는 것은 그 말만으로도 포근함과 위로를 느낀다. 누구나 좋아하고 반길 마음이다. 포용력, 여유, 온유함도 그 선한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융통성'은 뭔가 다른 부류다. 늘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융통성과 대조되는 게 원칙이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 둘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조화시키는가의 문제가 늘 등장한다. 원칙과 융통성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둘 건지는 상황이나 경우, 대상이나 일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기준은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갈수록 싸움이 심해지는 근본 원인은 이기심이다. 자신을 위하려는 바탕으로는 원칙이든 융통성이든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남을 위하고자 하는 동기, 진정으로 이웃을 생각해주는 마음 바탕이어야 그 두 가지가 선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비난을 위한 원칙이나 눈감아주기 위한 융통성은 선한 것이 될 수 없다.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드는 것은 원칙이나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 원칙을 강조하면 고지식하다거나 고집스럽다는 말을 듣지만 고지식이나 고집은 원칙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있어야할 융통성이 없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남이 자신에게 융통성 적용해주기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에게 있을 텐데 자신도 남에게 그렇게 적용해주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의 백성답기 위한 원칙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죄인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은혜를 융통성처럼 여기는 예가 우리 주위에 흔하지 않은가. 죄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변함없는 원칙이다. 그래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흔드는 일에도 결코 인간의 융통성이라는 구실을 적용할 수 없다.

원칙을 행할 주체는 우리이고 융통성을 행하실 주체는 하나님이시라고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어디까지나 원칙 위에 서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다. 하지만 그 원칙을 벗어난 부분에 은혜라는 융통성을 적용해주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주신 원칙과 인간 현실의 괴리를 친히 채워주시려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죽으신 것이다. 신앙인들이라면 그래서 예수를 힘입어 스스로를 하나님 주신 원칙에 맞춰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순결'이 원칙인가 융통성인가. 정직함, 윤리의식, 공경심, 세상과 구별됨 등은 어느 쪽인가. 성경에 융통성에 해당하는 말씀은 있나. 도리어 "온전하라" 명하신다. 물론 온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원칙이다.

융통성이란 핑계가 활개 치는 세대… 허용될 수 없는 일에 사람 뜻대로 융통성을 적용하기 때문에 세상이 오염되고 어두워져가는 것이다. 혹 융튱성을 이기적으로, 정욕 위해 적용하고 있진 않나. 원칙을 남 이기려는 생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신뢰함이다. 하지만 원칙 위에 굳건히 서있을 때에야 은혜가 진정한 은혜가 될 수 있다.
2016년 4월 12일 신승호 지나친 사람 우상화 22
옛적에는 돌이나 나무를 깎아 우상을 만들었다면 요즘은 사람으로 우상을 만든다. 부모가 자녀를
우상화하거나 연인이나 배우자를 우상시 하는 경우들을 흔히 보지만 특히 연예계나 프로스포츠계의
스타들을 보면서 사람을 우상화하는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걸 느낀다. "잘 한다"로 충분한데 숭배까지
한다. 현대의 사람 우상화가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될진 몰라도 분명한 사실은 그게 사람들
마음을 앗아가고 만물과 인류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한다는 점이다.

재능은 칭찬받을 만하다. 뛰어난 노래나 연기 실력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주니 찬사가 마땅하지만
그런 재능을 여왕, 황제, 별 등의 수식어를 동원해 우상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특정 인물의
우상화를 가벼운 재미 정도로 여길지 몰라도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우상에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엔터테이너는 어디까지나 엔터테이너다. 스트레스 많은 현대인들에게 대중 오락은 필요한 위로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가진다. 잠시 즐기는 정도를 넘어 거기 취하기 시작하고 엔터테이너들의
말과 행동, 표정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도가 심해지면 그게 없이는 사는 맛이 없을 듯한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 영향력이 청년들에게는 더 강하게 작용한다. 이젠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사람 우상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연예계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을 본다.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큰 능력을 보이며 나타나는 이단의
교주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짐작한다. 또 전 세계를 뒤흔들 정치혁명가일 수도 있고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재계의 거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연예계의 스타가 그 적그리스도로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속화’는 이 시대 청년사역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인식하고 고민하는 문제일 거다. 이 시대만큼 미디어가
발달했던 적이 없고 지금처럼 클릭 하나로 온갖 오락거리들을 접할 수 있던 때가 없었다. 활력 넘치는
청년들에겐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스타들이 에너지 발산의 대상으로 적격일 테지만 그래서 청년들이
스타들에게 쉽게 사로잡힌다. 그리고도 그 노예 된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혹 교계에는 ‘사람 우상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진 않나. 사람을 얻는다는 게 영혼을 주님께 인도함보다
예배당을 채우기 위함일 수도 있고, 유명 부흥사나 찬양사역자의 모습이 부각되는 것도 잘 분별해야
할 일이다. 사람이 드러나면 하나님이 가려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면서 시선과 마음이 사람에 매일 순 없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재능은 재능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 같은 사람에게 마음 뺏길 일이 아니다.
오직 모든 존재를 있게 하신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그분만이 우리의 참된 경배를 받으실 분이다.
2016년 3월 22일 신승호 안락을 추구함은 게으름이다 98
'귀찮다'는 '귀하지 않다'를 줄인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실제 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쓰이기보다 귀한 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할 때 자주 쓰인다. 꼭 해야 할 일, 생각해야 할 문제인데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한다.
바로잡아야 할 관계, 고쳐야 할 습관인데 귀찮다고 내버려둔다. 귀함은 알지만 자기 몸과 맘을 더 아끼기
때문이다. 그것이 게으름의 본질이다.

귀찮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실은 귀한 것이다. 분별을 바로 해야 한다. 귀하고 않고는 자신의 판단에 달린
것이지만 그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치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소중한 뜻이
담겨있다. 즉 자기 눈에 귀히 보이는 대로 행하라 하시는 거다. 그렇게 할 때야 자신의 존재 이유가 드러난다.
판단의 옳고 그름보다 그 판단을 실행함이 더 중요하다.

자신을 아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면 게으름이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향한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게 된다. 이 땅에서의 주어진 시간과 환경 안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제대로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게으른 본성, 즉 안락하려는 욕구를 다스리는 일이 먼저다.

현대 문명은 '편리함'에 가치를 둔다. 그러다보니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도 나쁜 일로 여기지 않게 된다.
하지만 안락 추구가 게으름으로 자라고 게으름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거부로 자라간다. 그로 인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모습이 갈수록 굳어져간다.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몸을 쓰지 않으니 온갖 이상한 병이 생긴다.
고된 일엔 사람이 부족하고 편한 일엔 경쟁이 치열하다. 안락함이라는 거짓 가치가 게으름을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다.

게으름은 잘 깨닫지 못한다. 알아도 별 문제 삼지 않는다. 특히 신앙인들의 게으른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느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께 충성함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면서도 몸과 맘의 욕구가 우선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기보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한다. 하나님이
'귀찮아'지는 건 아닌지. 마지막 때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이웃 위한 마음도 귀찮아진다.
예수님은 게으름을 '악'이라 말씀하셨다. 인류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주범이 게으름이라는 뜻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어떤 일과도 견줄 수 없는 대혁신이다. 그보다 더 위대한 일,
더 큰 희생이 없다. 결코 이겨낼 수 없었던 인간의 연약함을 그 죽으심을 힘입어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연약함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게으름'…, 그 고질병을 치유할 길이 이젠 우리 앞에 열려있다.

성장은 변화다. 자라기 원해도 변화를 거부하면 자랄 수 없다. 게으른 바탕으로는 새로워질 길이 없다.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 날마다 친히 함께 하시며 이끌어주심을 믿는다면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신앙인이라면 '귀찮다'는 말이나 생각은 버려야 한다. '게으름'이란 잠에서 깨어나자. 모든 일과 관계에서
열심과 정성을 내자.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음의 삶에 적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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